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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枝庵 복원이 첫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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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차인연합회 작성일06-01-25 00:07 조회5,1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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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지암 복원이 첫사업 ] - 朴 權 欽 (會長)

사단법인 한국차인연합회는 1999년 1월 20일로서 창립 20주년을 맞게 되었다.
20년 전 이 나라에 차문화를 중흥시켜야겠다는 데 뜻을 같이 한 차인들에 의해
한국차인연합회가 창립되었던 것이다.
그때 차인들은 茶山 丁若鏞 선생이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만들었던
茶信契를 생각하면서 한국차인연합회를 만들었던 것 같다.
다산 선생은 제자들과 더불어 다신계를 만들어 그 당시 쇠퇴했던 차문화를
중흥시키는 운동을 전개 하셨다. 다신계를 만드는 데에는 선생의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에는 茶經을 지은 陸羽 선생이 있고, 한국에는 東茶頌과 茶神傳을 펴낸
초의 선사가 있고, 일본에는 풍신수길의 다사로서 풍신수길의 조선 정벌에
반대해서 자결한 센리큐(千利休) 선생이 잇다.
한국차인연합회는 차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국민정신을 함양시켜야
한다는 목적을 설정하고 차문화 중흥에 최선을 다해 왔는데, 여기에는
초의 선사의 동다송과 다신전에 나타난 차 정신이 정신적인 배경이 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차인연합회가 창립한 후 첫 사업으로 초의 선사가 기거하시어 우리
민족 차문화의 중흥 터전이 된 해남 대둔사 일지암을 복원하여 차문화의
성지로 삼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1년 5월 25일 차의 날을 제정, 선포하였고, 이 날을 기점으로하여 매년
5월 25일 차의 날 기념 축제 행사를 해 왔다.
한국차인연합회는 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차씨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대렴 공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리산 쌍계사 앞에
'大廉公茶始培地追遠碑'를 세웠으며, 1993년에는 자체 연수 기관으로
한국다도대학원을 설립하여 다도 교육의 지도자를 양성하여 왔다.
한국차인연합회는 그 동안 국제 차문화 교류도 활발히 전개한 결과
1996년에는 국제차문화연토대회를 서울에 유치하여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서 우리 차문화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였다.
20년 전과 오늘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감출 수 없다. 차 인구도
늘고 차문화도 발전하고 차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높아졌다.
한국차인연합회 가맹 회원 단체도 지금은 1백 30개를 넘어섰다.
한국차인연합회는 탄생 20주년을 자축하면서 새로운 20년을 향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야 하겠다.
20년 전 그 당시 어려웠던 여건 속에서 한국차인연합회를 창설하였던
선각자 여러분께 감사하고, 그 동안 전국에서 차문화 중흥에 희생적으로
활동해 온 차인 여러분의 노고에 찬사를 보내면서 다산 선생이 남긴
다음의 말씀을 되새긴다.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을 마시는 민족은 망한다"

( 茶人 1999년 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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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차의 역사]

茶나무는 산다속(山茶屬)에 속하며 중생대 말기에서 신생대 초기에 생겨난 식물로
식물학적인 기원은 대개 6천만∼7천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오랜 역사를 갖는 차를 언제부터 마시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마시는 음료로서 이용된 것은 아니고,
음식과 약의 기능을 갖는 '식약동원(食藥同源)'소재로서 이용되기 시작하여,
천지 신과 조상의 제례에 사용하면서 점차 일상의 생활 중에 마시는 기호 음료로
정착되었다.

중국의 육우가 지은 다경(茶經)중에서는 B.C 2700년의 신농(神農)시대부터
마셨다고 하나 실제적으로 신농시대 이전부터 차나무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5천년 이전부터 차를 마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당시에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만 전해 내려온 것이므로, 그 진실여부에 대해서는 누구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과학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약초의 주용 독성분이 알칼로이드이므로
차의 폴리페놀성분과 쉽게 결합해 해독의 효과를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폴리페놀 이외에도 카페인 등에 의해 뇌에 대한 자극이나 강심작용으로
소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같이 원시시대에는 약이라는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알려진
효능을 통해 점차 차의 섭취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인간과 깊은
관계를 유지해 온 이유도 바로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용으로 이용된 보건성
음료였기 때문이다.

신라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대 시대 문자상으로 나타난 차의 기록은
B.C.1115년 주공단(周公旦)의 『이아석목편(爾雅釋木編)』중 "가, 고, 도( , 高, 道)"란 기록이 있고, 『중국풍속사』에 따르면 차는 약용이나 제례용뿐만 아니라 이미
음료로서도 이용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뒤에는 요리에도 이용되었는데,『본초주석』에 "차가 약용으로 제공되고
어린 잎은 소채(蔬菜)로도 이용되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B.C.1066년 " 서주의 파촉(지금의 중경, 성도 부근)지방에서
차의 재배가 행해졌다"고 하며, 이후 "춘추전국시대(B.C. 722∼221년)에 한민족과
소수 민족에 의해 차의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차가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인 B.C. 59년 전한
시대로 왕포의 『동약』중에 "무양(武陽)에서 차를 사온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사천(四川)일대에서는 차가 사대부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시장에서
상품화되었고 매매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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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차 종자가 처음으로 파종된 때가 "신라 42대 흥덕왕 3년
(828년) 왕명에 의하여 대렴(大廉)이 당(唐)으로부터 가져온 차종자를 지리산
계곡에 심은 것으로 전하나 이미 선덕여왕(632~647) 시절에 차가 있어 왔는데
이때 이후 더욱 성행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신라인들은 일정한 의식과 관계없이 생활속에서 차를 사랑하였다.
특히 국선(國仙)이던 화랑들은 산천경계를 유람하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차를 즐겼다.

강릉 한송정에 석정(石井), 석구(石臼)같은 유적이 아직 남아있는 것도 좋은
증거이지만,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나타난 설총 '화왕계(花王戒)'도 참고가
될 만하다.
화왕계에는 왕이 차와 약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기운을 내야 간신들을 물리치고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라때 화랑들 사이에서
차생활이 성행했으며 이것이 삼국을 통일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을 말해준다.



신라인들이 차를 마시는데 어떤 예법을 지켰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차는 군자의
기질과 덕을 지니고 있다고 했고, 맑은 인격과 고매한 학덕, 예(藝)를 고루 잦춘
사람을 '다인'(茶人)이라고 칭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차는 잠을 쫓고 정신을 맑게 할 뿐만 아니라 명상에 적합하므로 수도하는 승려,
수련하는 화랑(花郞:귀족)과 낭도(郎徒 : 평민)가 애음하였으며, 또한 야외 중심의
음다풍(飮茶風)이 성행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이 자주 마시던 차를 '삼국유사'에는
말차(沫茶), 즉 잎차를 갈아서 가루로 만든 차라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은 잎차와 말차가 함께 있었으나 말차가 더 성행하였을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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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

신라의 다예(茶藝)를 계승한 고려의 다예는 우리나라 역사상 차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왕이 손수 말차를 제조할 만큼 왕실과 사원에서 차를 중시하고 애음(愛飮)하였으며, 주요 국가행사는 반드시 주과식선(酒果食膳)을 올리기 전에 임금께 차를 올리는
진차(進茶)의식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궁중에 차를 취급하는 관청인 다방(茶房)이 설치되고 사원에는 차를 재배,
제조하기 위한 다소촌(茶所村)이 마련 되었으며 대중용 차가게인 다점(茶店)과
(훗날 차문화가 쇠퇴하면서 주막으로 고쳐부르게 됨) 여행자 휴게소인 다원(茶院)이 설치되었다.

궁중의 의식 즉 왕비책봉의(王妃冊封儀), 공주하가의(公主下嫁儀), 연등회 및
팔관회등에서 진차례(進茶禮)가 시행되었음은 물론 일반에서도 다례가 시행되었다.


고려인들은 차를 기호음료로 즐겨 마셨으며 차를 마시는 즐거움 이외에 차를 달이는 분위기에 도취되곤 하였는데 이러한 다풍은 신라의 그것과도 매우 흡사하였다.

고려인들이 마시던 차의 종류 역시 신라와 마찬가지로 잎차, 말차, 단차였는데
이중에서 말차의 음용이 가장 성행하였다.

고려인들의 차생활은 왕실에선 다분히 의식적이었고, 일반 선비사회에서의 차생활은 격식없는 자유 분방한 것이었지만 차 생활로 머리를 맑게하며 차와 더불어 문학을
논하고, 정치적 혼돈 속에서는 스스로의 심성을 순화시키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차를 음미함으로써 인생을 다듬고 되돌아보고 때론 반성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차는 그렇게 사랑받으면서 불교를 더욱 깊이 있게 했고 문화 예술의 발전과 함께
민족의 인품을 향상시켰다.
신라시대 이상으로 덕망있는 군주나 고매한 학자들은 '차인'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큰 명예로 여겼다.

이 시대에 또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영국 사람들이 홍차를 담기 위해 본차이나를
빚었듯이, 고려인들의 차문화와 더불어 꽃피웠던 고려 청자의 역사다.

중국으로부터 차문화가 전파되면서 귀족, 왕실, 승려 사이에 차마시는 습관이
급격히 확대되어 도자기의 수요도 크게 증가했는데 그 증거로 초기에 도자기를
만들었던 가마터에서 의식 용구가 출토되었고 출토된 유물 대부분이 차를 마시는
그릇인 다완(茶宛)이었다.

12세기에는 상감청자라는 독특한 제조법이 개발되어 청자문화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생산 품목도 다완뿐만 아니라, 화장용구, 문방용품, 건축용 자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고 차를 마시는 방법도 고려와 조선초까지는 말차(가루차)가 성행하였으나 이후 오늘날과 같은 잎차가 생산되면서부터 차 마시는 도구도 찻사발에서 찻주전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처럼 고려시대는 차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세계적인 청자문화가 번성하였던
시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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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고려의 융성했던 차문화는 숭유억불의 조선조로 접어들면서 급격한 쇠퇴 현상을
보였다.
온 국민이 즐겨하던 기호음료에 종교색이란 있을리 없지만 차는 마치 '불교의 상징'
처럼 인식되어 조선의 분위기에서는 멀리하여 쇠퇴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조선의
돌이킬수 없는 실수였다.
관혼상제의 차는 모두 술이나 청정수로 고쳐지게 되었고 급기야 중엽에 이르러서는 척불(斥佛)로 인하여 사원 활동이 위축되고 그로 말미암아 사원 주위의 차생산은
급격히 감소하였다. 또한 차공(茶貢)제도로 인해 차 생산이 없는 지역의 민초들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한편 구웅의 차마시는 풍습은 전혀 엉뚱한 데서 전해지고 있었으니 종정의 다풍은
고려 때보다 더 격을 갖추었고, 다시(茶時)를 두어 매일 일정한 시간에 차를 마시며
토론을 벌이는 자리를 만들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TEA TIME과는 달리 우리의 티 타임의 역사는 무려 600여년이나 되지만 후손도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역사속에 파묻혀 버렸다. 단순한 휴식'의 개념
이상의 기능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 좋은 점을 간과해 버린 것이다.


15세기 말, 16세기는 그렇게 차문화가 쇠퇴일로를 걷던 시기였던 반면 일본에서는
다도가 성행하게 된 시기였다.
더구나 1592년 발발한 임진란 7년을 겪으면서 조선 천지는 피폐해졌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또하나 감당하기 어려운 난제가 겹쳤으니 명(明)이 전쟁을 도와준
대가로 요구한 세폐에 조선으로서는 감당키 어려운 많은 양의 차가 포함된 것이다.
조정은 어려운 상태였고 차 생산을 급격히 감소한 때였는데도 조정은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강제로 차세를 부과하는 통에 야생하는 차나무가 있는 지리산 남쪽의
백성들은 특별한 고초를 겪어야 했고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이윽고 차나무가 있는
산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차는 은혜의 식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원수 덩어리였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이 편찬되고 차 대용음료인 인삼즙, 쌍화탕,
결명자, 율무등이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차는 더욱 더 깊이 숨게 되었다.

차가 본디 고유명사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커피도 차의 일종으로 취급하는 '무식'이
싹트기 시작하여 아무것이나 다 차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핍박과 시련속에서도 한국의 다성이라 일컬어지는 초의 장의순이
조선의 대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에게 보내진 차로 말미암아 차를 나누는
자리마다 초의 이야기가 전해졌고 초의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다승(茶僧)'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쯤되니 초의도 점차 차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다도를
알려고 초의를 찾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신전(茶神傳)을 펴냈으며,
다신전에 이어 6년 후에는 동국(東國)의 차를 노래하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다서의 불모지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되었고, 차는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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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제 시대에는 일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그리고 한국차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광주의 무등다원, 정읍의 소천다원, 보성에 보성다원등이 조성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 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차는 경상도와 전라도 이남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사원이나
가정에서 소규모로 생산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규모의 다원을 조성하여 생산하고
제조하는 경우도 있다.

지리산 쌍계제다, 화개제다, 지지산 제다등의 소규모 차 가공 공장이 있으며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보성다원은 광복후의 혼란과 6.25 사변등으로 인해
황폐해졌으나 20~30 여년 전부터 일어난 차마시기 운동으로 전국에 100여개
이상의 차 생산 공장이 생기면서 매우 활성화되고 이제는 오히려 외국에서
상당량의 차를 수입할 정도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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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바꾼 차>

식수가 나쁘고 신선한 채소를 자주 섭취할 수 없는 티베트, 몽골등 사막이나
고원지대를 이도하는 유목민에게 차는 생필품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라비아와 교역이 활발했던 중국의 당,송나라 양대에, 수개월을 항행하던
아라비아 선원들은 괴혈병에 자주 걸리던 반면 중국 선원들은 거의 무사했습니다.
이는 항상 먼 길을 떠날 때 비타민 C가 풍부한 차를 반드시 챙겨 떠났던 중국인들의
습관 덕분입니다.

일찍부터 차의 중요성을 깨닫고 생활화했던 중국인들은 차로 인해 영국과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중국역사상 일대 전환점, ‘아편전쟁(1840)’으로 이어졌습니다. 중국차를 대량 수입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중국차, 도자기 등의 수입으로 은이
대량 유출되고 재정이 위태로워지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슬그머니 아편을
중국으로 밀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아편으로 중국 전체가 혼란에 빠지자
청나라는 영국의 아편을 몰수, 소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곧 전쟁의 빌미가 되고, 결국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자국 영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는 수모까지 겪게 됩니다.

비록 받아들인 시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홍차의 나라’로 알려진 영국의 차문화는
훌륭한 차문화를 꽃피우는 데 일조를 했습니다.



영국인들은 차를 마시는 시간과 잎의 색으로도 다양한 차릐 종류를 만들었는데, 인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던 배 속에서 녹차가 발효되어 변한 홍차, ‘블랙티(Black Tea)'와 오후에 마시는 ’애프터눈티(Afternoon Tea)'의 유래를 간직할 만큼,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매일 5~6잔의 홍차를 즐겨 마시며 차문화를 즐기고 있습니다.



1773년 12월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시절, 신대륙의 개척자들은 차에 부과되는
세금에 반발해서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ARTY)'을 일으키는 데,
이는 얼마 후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독립한 미국은 이후에도 차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하는데, 먹기 좋고
간편한 ’티백(tea bag)'을 고안했고, 1904년 ‘아이스티(Ice Tea)’를 처음 만들었으며,
차 무역에 혁명을 일으킨 ‘tea clipper(고속범선)’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미국에서
였습니다.

러시아에는 17세기 중국에서 차가 전래되었는데, 영국과 달리 중국관는 바다가
아닌 육지로 이어져 있으므로, 배 대신 수백 마리의 낙타떼를 모는 캐러반이 차를
운반했습니다.
추운 나라 러시아에는 차가 냉기를 달래주는 이상적인 음료였습니다.
러시아 차문화의 상징인 ‘사모바르(samovar)'는 티베트 지방의 찻주전자에서
유래된 것으로 이는 신체와 방안을 데우는 난방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실내 건조를
막는 ’가습기‘역할까지 했습니다.

이와 같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오랫동안 차를 마셔왔으며, 차를 얻기 위한
전쟁까지 불사하며 특징적인 민족의 문화를 꽃피우는 데 차를 이용해 왔습니다.

차가 세계 각 나라의 정신 문화를 나타내고, 인류의 역사와 늘 함께 존재하는
기호음료로 일찍부터 알려져 왔음이 자연스럽게 입증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차문화협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