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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차인 (有名 茶人)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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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차인연합회 작성일17-07-25 12:01 조회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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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李瀷- 1681-1763 호 星湖. 벼슬 않고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한 실학자.
  '星湖僿說'을 씀
이자현 李資玄- 1061-1125 자 眞靖, 호 息庵, 청평거사, 희이자希夷子.
 1089(선종6) 과거에 급제하여 大樂署丞이 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산에
 아버지가 지은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치고 당과 암자를 짓고 은거한다.
 예종이 차와 향, 금가 비단을 보내 불렀으나 거절한다. 사촌 이자겸 일문은 백여년
 세도를 부렸음에도 권문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사적 새긴 '文수院重修碑'에 고려
 예종과 인종이 차를 하사(賜茶)한 기록과, 뒷면에 '배고프면 밥을 먹고 목마르면
 차를 마셨다. 묘용이 종횡무진하여 그 즐거움에 걸림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茶道와 禪學, 노장사상에도 심취했다. 부귀공명을 버리고 산 은둔거사이자
 욕심을 버려 무엇에도 자유하며 산 신선같은 차인이었다. 그에게 벗은 오직 자연과
 禪, 그리고 차뿐이었다.
이재 李栽- 1657-1730 호 密庵. 퇴계학통
 이재 李縡- 1680-1746 호 陶庵. 이조참판. 김창협의 문인, 후기 성리학의 대가
 이제현 李薺賢- 1287-1367 처음 이름 之公, 자는 仲思, 호 익제. 14세 성균시 장원 15
세 병과 급제한 뒤 과거를 감독하던 권보의 딸과 혼인, 판관, 녹사를 거쳐 司憲糾正
에 발탁되어 관료로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다. 28세 상왕인 충선왕의 명을 받아 원나
 라 수도 연경에 간다. 거기서 萬卷堂을 짓고 원나라 선비 학사 원맹선, 글씨로 유명
 한 조맹부 등과 교유하고 견문도 넓혔다. 또한 충선왕을 따라 아천의 아미산, 절강
 의 보타산, 감숙성까지 다녀왔다. 과거를 주재하는 책임자를 知貢擧라 하는데 그가
 뽑은 대표적인 인물이 이색이다.
문장의 宗祖라고 칭송받은 그의 영정이 봉안된 보은 念修齋가 있다. <茶詩>
 "주린 창자는 술 끊으니 메스꺼워지려 하고/ 늙은 눈으로 책 보니 안개가 낀 듯하네
 누가 두 병을 말끔히 물리치게 할까/ 나는 본디 약을 얻어 올 데가 있다네/ 동암은
 옛날에 녹야의 벗이었고/ 혜감은 조계산의 주지 되어 갔네/ 빼어난 차 보내오고
 아름다운 서찰 보내오면/ 긴 시로 보답하고 깊이 사모했내/ 두 늙은이의 풍류는 유
 불의 으뜸이고/ 백 년의 생사가 오직아침 저녁 같구나/ 향 맑으매 일찍이 적화 전
 의 봄에 딴 잎이라네/ 부드러운 빛깔은 아직 숲 아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우
 우 솔바람 소리 울리고/ 오지사발에서는 어지러이 맴돌아 젖빛 거품을 토하네"
이정구 李廷龜- 1564-1635 문신, 자 聖徵, 호 月沙, 保晩堂.
대제학, 좌의정. 중국에 여러차례 다녀와 '朝天紀行錄'씀.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
 했다. 대대로 차를 애용한 명가로 이어진다.
이종성 李宗城- 1692-1759 호 梧川. 영의정
 이진망 李眞望- 1672-1737 자 久叔, 호 陶雲, 景奭의 증손.
형조판서 때 동지사로 중국에 다녀옴. 영조의 잠저시절 사부, 좌참찬 역임.
이천보 李天輔- 1698-1761 자 의숙, 호 진암
 이조, 병조 판서, 영의정.- 후에 다시 영의정-장헌세자의 원유사건으로 자결함
 이하곤 李夏坤- 1677-1724 문인 화가, 호 澹軒. 鄭선, 尹斗緖 등과 교유함
이하응 李昰應- 1820(순조20)~1898(광무2) 자는 시백, 호는 石坡. 시호는 헌의.
 고종의 아버지로 본관은 전주.
 1843년 興宣君에 봉해지자 세도정치를 타파하고 서원을 정리함. 書畵에 능하고
  난초를 잘그림
 이헌경 李獻慶- 1719-1791 호 艮翁. 대사간, 한성판윤. '杞井記'를 씀
 이형상 李衡祥- 1653-1733 호 甁窩. 한성부윤. 영천에 洪然亭을 짓고 차를 즐김
 이현석 李玄錫- 1647-1703 자 夏瑞, 호 游齋, 粹光의 증손자.
삼사의 벼슬을 역임. 후에 경상관찰사- 형조판서를 지냄. 글씨를 잘쓴 차인.
이현일 李玄逸- 1627-1704 호 葛菴. 이조판서.
이후 李후- 1694-1761 호 鰲隱거士
 船橋莊을 지은 효령대군의 11세손 무경 이내번李乃蕃의 손자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만석의 농토를 재력삼아 풍류를 즐긴 은둔거사였다.
추사 등 한양의 선비들이 강릉 먼곳에 찾아왔는데 편액과 수많은 茶詩들이 남아
 있다. 차를 마시는 전용공간인 茶亭 活來亭(궁궐누각 부용정을 본뜸)은 1816(순조
16)년 오은의 나이 46세에 지어져, 당시 다산초당의 정약용, 일지암의 초의선사,
정조의 사위인 해거재 홍현주, 차시를 가장 많이 남긴 자하 신위 등 차인들이 차문
 화를 격조있게 끌어 올렸던 시대이다.
 <烏川 鄭熙鎔의 칠언시> 가지마다 밝은 꽃과 빽빽한 대나무 들어 있는데/ 주인은
 작은 연못 속의 정자에 있네/ 구름이 걷히니 푸르름이 산봉우리에서 그림처럼
 드러나고/ 비가 내린 후 붉은 꽃은 젖어서인지 온갖 풀이 향기롭구나/ 느지막이
 휘장 치고 동자 불러 차 한잔 얻으니/ 난간에는 퉁소 부는 객이 있어 차향 속에 잠겨
 있네/ 그중에서 신선의 풍류 얻을 수 있으니/ 아홉번이나 티끌 세상이 헛되이 긴줄
 알겠구나. - 활래정에서 차를 마시며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임상원 任相元- 1638-1697 문신, 자 공보, 호 염헌. 지평 중의 아들.
대사간,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오고- 도승지- 공, 형조 판서. 좌, 우 참찬을 지냄.
차를 너무 좋아해 언제나 곁에 두었다고 한다. 차시도 70여 수 전한다.
 '전원에 늙어가며 미투리 한 켤레에/ 관복 벗어버리고 두건 하나 썼다네/
마시고 난 찻사발 베개 삼아 누우니/ 펄펄 나는 새 그림자 창을 자주 지나네'
임수간 任守幹- 1665-1721 자 用譽, 호 돈와. 相元의 아들.
1711년 통신 부사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東사日記' 남겨- 일본 견문과 차문화를 소개
 우승지 지냄. 문장과 경사에 밝고 병법, 지리에 정통.
 '나이 드니 마음 쓸 곳 없고/ 가난하니 그윽한 것이 좋다네/ 시제를 찾아 먼 산 바라
 보고/ 찬 샘물 길어 차 달인다네'
자장 慈藏- 약590(진평왕 12)~658(태종무열왕 5). 신라시대의 승려. 속명은 김선종랑
 金善宗郞. 흔히 자장율사라 부른다. 통도사를 창건하고 금강계단을 세우는 등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저서-아미타경소, 아미타경 의기, 사분율갈마
 사기 등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일본 승려 료추良忠의 법사찬사기 속에 아미타
 경의기에서 옮긴 구절이 남아 있다.
장원 張源- 中 明나라 포산사람. 호 초해산인. 산속에 숨어 제자백가를 공부, 여가에
 차를 즐기며 유유자적함. 저서 '茶錄'
장유 張維- 1587-1638 문신, 자 持國, 호 溪谷. 仁宣王后(효종비)의 아버지.
金長生의 문하. 딸이 봉림대군에게 출가 신풍부원군이됨. 우의정에 임명되자 18차례
 나 사직소 올림. 천문, 지리, 서화 까지 능한 차인.
장의순 張意恂- 1786(정조10)-1866(고종3) 호 艸衣, 海翁, 紫芋山房, 一枝庵. 자 中孚.
15세 남평 雲興寺로 출가. 19세 大興寺의 玩虎에게서 具足戒와 초의라는 호를 받음.
24세 茶山을 만나 경서와 시문을 공부하고 이때부터 차를 가까이 하게됨.
1815(30세) 처음 한양에 상경 폭넓게 교유하게 된다.(秋史 형제, 申緯, 洪顯周 형제)
1823(39세) 일지암을 짓고 10년간 선과 다도경전에 전념, 많은 詩藁를 씀.
해남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에서 40년간 수행. 다선일미의 경지를 추구함.
저서 茶神傳(明代 中國의 茶에 관한 것), 東茶頌(1837년, 52세, 500여자), 一枝庵遺稿
차를 직접 만들어 선사해 많은 사례의 글을 받았다. 자신의 茶詩는 20여편에 불함.
茶詩 '펼쳐놓은 四時는 걷어갈 날 없으니/ 맑은 봄 한 켠에서 화로에 차 끓이네'
정래교 鄭來僑- 1681-1757 문인, 자 潤卿, 호 浣巖.
1705년 일본 통신사의 역관으로 다녀옴. 승문원 제술관. '완암집'에 차시.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호 圃隱 본관 영일, 출생지 영천, 충절지킨 丹心歌 지음.
1360(공민왕9) 문과에 장원급제-예문관 검열, 수찬-여진토벌에 종군-典寶都監判官
부모상 관직 놓고 3년상 시묘살이(임금이 정려旌閭(효자문)를 내림)-이듬해 예조
 정랑과 성균박사 겸임-명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 오던 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
 살아- 권신들의 배명친원의 외교방침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유배-九州(규슈)로
 가서 왜구단속을 요청하고 잡혀간 고려백성 수백명을 귀국시킴-기울어가는 고려를
 바로잡고자 동분서주하다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 선죽교에서 격살된다.
차시 <讀易> 돌솥에 찻물이 끓기 시작하니/ 풍로에 불이 붉다/ 감(坎:물)과 이( 불)
는 천지간에 쓰이니/ 이야말로 무궁무진한 뜻이로구나. 차시 石鼎煎茶도 유명하다.
유적지- 개성 선죽교, 광주 충렬서원. 목은 야은과 함께 三隱이라 부른다.
정범조 丁範祖- 1723-1801 자 법정, 호 해좌.
정언, 대사성, 개성유수,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지냄.
정약용 丁若鏞- 1762(영조38)~1836(헌종2) 실학자, 본관은 羅州. 자는 美鏞, 頌甫,
호는 三眉子, 茶山, 俟菴, 紫霞道人, 苔수門巖逸人, 탁翁, 鐵馬山憔. 당호 與猶堂,
四宜齋. 시호는 文度. 세례명 요한.
진주목사 재원의 아들, 이승훈의 처남.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수찬, 경기암행어사,곡산부사, 형조참의를 지냈다.
1801(40세) 신유박해 뒤 해미, 장기, 황사영 사건으로 강진 등으로 18년간 유배생활.
당시 형 若銓도 원적되고, 若鐘은 옥사 함.
다산은 20대 초반에 이미 차를 가까이해 귀양 오기전에도 차에 대한 식견이 높았다.
1801년 강진에서 보은산방으로(1805), 이학래의 집으로(1806), 1808년 봄에 茶山으로
 옮겨 10년을 지내는 동안 茶山草堂을 짓고 차를 마시며 학문과 저술에 전념했다.
해배되기 얼마전부터 제자 18인을 중심으로 다신계를 만들고 그 절목을 기록하여
 그 후 100여년간 규약이 지속되었다.
1818년 고향으로 돌아와 陽明學과 북학파 이론을 흡수 집대성하고, 퇴계와 율곡의
 이기론을 합성했다. 1910년 文度公 시호를 받음.
학문에 몰두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 '牧民心書 1821년 총48권', '與猶堂全書 1934-
1938 총154권 76책 활자본'간행. '經世遺表' '欽欽新書' '雅言覺非' '我邦疆域攷' 등
 그안에 차에 관한 글이 70여군데나 된다. 중국역대 차문화사를 살핀 최초의 저작
 '각다고'
다산은 1805년 우연히 만덕산 백련사로 놀러갔다가 야생차가 자라는 것을 보고
 아암 혜장 등 수많은 승려와 주변에 차만드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1809년
(48세), 초의(24세)를 만나 유학과 시도를 가르치고 제다법을 가르쳐준 선각자.
금당기주에- 틈 날 때마다 초의에게 유학의 도리를 가르치고, 불교의 허망함을
 지적했다. 다산은 유학이 수기修己(자기를 닦음)로 자아를 세워 의심이 없게 된
 후에 의문을 일으키는 공부라면/ 불교는 스스로 의심을 일으켜서 의심 없는 데로
 나아가는 공부라고 했다.
 '바다 위에 뜬 달 얼굴에 환히 비추고/ 성긴 머리카락 바람에 날리네/ 차 석 잔 기울
 이고 보니/ 종소리 온 세상에 울려 퍼지네'
정약전 丁若銓- 1758(영조34)-1816(순조16) 본관 나주. 호 손암, 연경재, 현산.
정약용의 형. 병조 좌랑. 1801년 신유사옥 때 흑산도로 유배 거기서 죽음
 저서: 현산어보 총3권, 송정사의
 정태화 鄭太和- 1602-1673 호 陽坡. 영의정 지냄, 사은사로 청에 두번 다녀옴.
정학연 丁學淵- 1783-1859 호 酉山, 다산의 장남
 저술 '종축회통種畜會通' 제3책 권5에 차 항목, 자신의 차지기로 두실태사 沈象奎
(1766-1836 영의정, 4만권의 장서와 기이한 물건갖춰 호사누린 인물)를 꼽았다.
아들 丁大林(1807-)
정학유 丁學遊- 1786-1855 호-운포耘逋 두형제는 아버지 다산의 제자들과 대둔사의
 승려들과 교유했다. 차의 일가견을 지녔던 차인
 정홍명 鄭弘溟- 1592-1650 자 子容, 호 畸庵. 松江 鄭澈의 아들. 宋翼弼, 金長生의 문인.
지평, 수원부사, 대제학 역임. 古文에 밝은 차인.
 <暮雪> '휘몰아치는 눈 아득하여 하늘이 저무는데/ 어지럽게 부는 바람은 굴뚝 연
 기 몰아가네/ 외로운 회포 근심스러워 잠자리 냉랭하여/ 혼자서 차솥에 손수 달인
 다네'
조경 趙絅- 1586-1669 호 龍洲.
이조판서, 우참찬.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옴.
조문명 趙文命- 1680-1732 자 숙장, 호 학암. 김창협의 문인
 우의정 때 청에 다녀와 좌의정. 탕평책에 공 세움. 글씨를 잘 쓴 차인.
 <야심독좌>'종남산 기슭엔 눈이 쌓였고/ 빈 처마엔 외로운 달 하나/ 늙은 느티나무
 문을 덮었고/ 창 앞엔 따뜻한 차화로라네'
조식 曺植- 호 南冥 1501(연산군 7년) 합천 삼가출생- 19세때 기묘사화로 숙부 彦卿이
 파직당하는 것을 보고, 과거공부 단념, 30세 때부터는 김해 신어산에 山海亭을 짓고
 제자를 길렀으며, 여러번 제수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퇴계와 쌍벽을 이뤘던
 그는 61세 때 여생을 보내려고 산청에 세칸 기와집 山天齋를 지어 敬과 義를 지키며
 살다 72세에 운명. (敬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義로써 밖을 반듯하게 한다-주역)
그는 그림을 좋아했다. 차와 바둑, 쟁기질하는 그림이 산천재 마루 벽에 그려져
 있다.
조찬한 趙纘韓- 1572-1631 호 玄洲.
선산부사, 문무겸전, 글씨에 능함.
조태억 趙泰億- 1675-1728 문신, 자 大年, 호 謙齋. 이조참판 가석의 아들.
대사성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옴. 경상감사, 우의정, 좌의정 역임. 초서 예서 그림
'논에 비충분해 모 다 심고/ 굽이진 물가 시원한 데 낚시하기 좋다네/
소찬과 조악한 차에 스스로 만족하지만/ 오랜 가난 맡은 늙은 아내 근심이라오'
조현명 趙顯命- 1690-1752 자 치회, 호 귀록.
이인좌의 난 때 공을 세움, 도승지, 이조판서, 우의정과 영돈령 부사로 두번 청에
 다녀온후 영의정을 지냄.
조희일 趙希逸- 1575-1638 문신, 자 怡叔, 호 竹陰.
예조좌랑, 중국 사신 접반사, 인조 때 예조참판, 강릉부사 역임.
시문과 서화에 능한 차인.
지장법사 地藏法師- 696(신라 효소왕 5년)-794(원성왕10) 99세 열반. 이름 金守忠
성덕왕의 맏아들로 출생, 18세 당 현종 때 숙위로 당에 갔다가 어머니 성정왕후가
 폐비되어 출궁된 소식을 듣고 3년만에 귀국- 왕자의 신분을 잃어 왕도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한다. 신라 절에서 지장이란 법명을 받은 뒤 720(성덕왕19) 24세 때 바다
 를 건너 중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다 唐 至德 연간 (신라 경덕왕 때) 구화산에 이러,
고행 끝에 구화산 전체를 지장신앙의 성지로 일구고 唐 貞元 10년(794년) 7월 30일
 열반. 오늘날도 연간 70만여명의 참배를 받고 있다. 고행한 동굴은 구화산 老虎洞
스님은 불법과, 신라에서 금지차와 黃粒稻, 오차송 소나무 씨를 구화산에 퍼뜨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를 남겼고, 最古의 漢詩를 지었다.
중국의 4대 불교명산의 하나인 九華山은 스님의 발원에 의해 지장신앙의 성지로
 성역화되어 있다. 특히 1200년전 신라에서 가져간 금지차金地茶가 지금도 '地藏佛
 茶' '九華山茶'로 판매되고 있다. 또한 九華街의 상점마다 지장보살을 외는 唱佛
소리와 茶 상품으로 넘친다.
754년 詩仙 李白이 54세 때 구화산에 들러 60세 노승 지장스님을 찬탄한 시도 있다.
 '...홀로 오랜 겁을 지내며 중생을 구해주는데/ 이 모든 것이 지장보살의 자비라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이 없으나 중국의 宋高僧傳, 神僧傳에 기록되어 있
 다. 中國의 全唐詩에 수록된 <送童子下山>이란 詩
'...암자가 적막하니 부모생각 나겠지/...단지에 찻물 끓이며 하던 장난도 그쳤네/
잘 가거라, 부디 눈물일랑 흘리지 말고/ 늙은 나야 벗 삼는 안개와 노을이 있느니라'
진각국사- 1178(고려 명종 8년 화순출생)-1234(56세 입적) 일찍이 진사인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공부, 1201(신종4년) 司馬試를 마치고 太學館에 들어감, 이후 길상
 사로 어머니의 49재를 지내러 갔다가 보조국사와 인연이 되어 출가함. 고종 때
大禪師가 되어 나라의 명에의해 여러 절을 전전하며 수많은 제자를 가르침.
그의 茶詩 <인월대隣月臺> '우뚝솟은 바위산은 몇 길인지 알 수 없고/ 그위 높다란
 누대는 하늘 끝에 닿아 있네/ 북두로 길은 은하수로 밤차를 달이니/ 차 연기는
 싸늘하게 달 속 계수나무를 감싸네'
탁월한 대시인이며, 직접 茶泉을 파기도함. 승주 송광사 광원암.
진감선사 眞鑒禪師- 774(신라 혜공왕 10년)금마(익산)출생-850(문성왕 12년)77세 입적
 법호는 慧昭, 시호 眞鑒, 탑호 大空靈塔(국보 47호 최치원이 비문지음), 빈한가정 생
 선장사, 804(애장왕 5년) 歲貢使 선단의 뱃사공이 되어 당나라로가 마조의 선맥을 이
 은 神鑑선사의 제자가 된다. 810(현덕왕 2년)에 숭산 소림사로 나아가 구족계를 받고
道義를 만나 함께 수행, 830(흫덕왕 5년) 귀국. 長柏寺(상주 남장사)에 머물렀다가 옥
 천사(쌍계사 전신)를 창건한다. 왕의 부름에 번번이 하산하지 않음.
하동 쌍계사, 花開는 지방 관아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茶所로 지정되었던 곳.
차나무가 사오십리나 잇달아 자라고 있다고 동다송에 기록되있다.
 <비문> '성품은 꾸밈이 없고 말 또한 꾸며하지 않았으며 옷은 삼베라도 따뜻하게
 여겼고, 음식은 겨와 싸라기라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밥에 채소 반찬
 은 두 가지가 없었다.
진묵대사 震默大師- 법명 一玉, 1562(명종17)-김제 만경출생-72세 입적.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차공양함. 일생동안 기인의 면모보여, 유학에 밝았고
 술도 穀茶라 하여 늘 대취 만행했다고 전해짐.
 <술에취하여 부른 노래>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아/ 달을 촛불
 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만들어 크게 취해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하노라'
채양 蔡襄- 中 宋. 시문을 잘 지음. 자 君謨. 개봉부, 福州, 泉州, 杭州 등을 다스림
 저서 '茶錄 상하 2편' '여枝譜' '채충혜집' 등
 채제공 蔡濟恭- 1720(숙종46)-1799(정조23) 문신. 자 伯規, 호 樊巖. 묘소 경기도 용인
 과거 급제, 교리, 호서암행어사, 도승지, 예조, 호조 판서를 지내고, 동지사로 청에
 다녀옴. 정조 즉위 후 벽파의 왕 시해 사건을 사전에 적발하고 수궁대장이 됨.
홍국영의 실각후 왕을 보필 여러 공을 남김.
좌의정 때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앙의 묵인을 주장 보호함- 영의정을 지날 때
 까지 10여년간 조용 했으나- 1801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후 박해가 심해졌다.
5대조 忠衍부터 종조부 彭胤을 거친 차의 명가에서 태어나 차는 다반사로 즐겨심.
저서 '번암집'권두에 정조어찰과 교지 수록
'가벼운 추위에 술기운 좋게 오르고/ 바람 자니 차 연기 간들간들 퍼지네/
뜰의 대나무는 무슨 사연 그리도 많아/ 밤이 들면 창 뒤에서 혼자서 읊어대나'
채팽윤 蔡彭胤- 1669-1731 자 仲耆, 호 希菴. 형조참판.
시와 글씨에 능해 '대흥사사적비문'을 찬함.
천리휴 千利休 센리큐- 日 1522-1591 茶道를 거의 완성된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
 그의 와비는 값비싼 명물(호화)도 아니고, 값싼 조잡품도 아닌 것에서 새로운 미를
 발견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친조선파로 제자 풍신수길에 의해 할복함.茶書 '남방록'
철감선사 澈鑒禪師- 798-868 속성은 박씨, 漢州출신, 집안은 대대로 호족, 18세 출가
10년간 화엄학을 익히다가 회의를 느껴 28세 때 사신 일행의 배를 타고 당으로 건너
 가 남전의 문하로 들어갔다. 남전 스승이 열반한 뒤에도 13년간 당나라에 머물다가
 문성왕 9년(847)에 귀국. 22년간 유학 생활. 귀국후 금강산 장담사에서 제자 징효와
 대중들에게 가르침- 신라 구산선문의 사자산문의 개산조, 천년 고찰 쌍봉사의 창건
 주, 경문왕 귀의 받아- 국보57호 사리탑지정된 철감선사탑(정교하고 웅장한 부도)
중국 안휘성은 철감선사가 유학을가서 남전의 회상에서 조주와 함께 정진했던 땅
 이다. 남전은 '平常心이 道'라는 가르침을 폈던 고승이다. 또한 남전의 정신을 이은
 조주는 불법을 물어오는 제자들에게 '차나 한잔 마시게- 끽다거 喫茶去'로 가풍을
 일으켜 화두로 정착시킴. 화순 쌍봉사
 철선혜즙 鐵船惠楫- 1791-1858 성 김씨, 법호 철선, 14세 출가, 완호에게 배우고,
수룡색성의 법을 받음. 20년 좌선에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초의와 가까움.
최규용 - 호 금당.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조용히 차생활을 영위하여 바른 차인의
 본보기를 보임.
최남선 崔南善- 1890(고종 27)~1957.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
 한샘, 남악주인南嶽主人 등. 한국근대의 계몽운동가. 사학자. 문인.
 한국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며 민족대표 48인 중 한사람이다.
 1958년 그의 거처였던 서울 우이동 소원素園에 기념비를 세우고, 방대한 양의
 '육당최남선전집'이 간행되었다.
최명길 崔鳴吉- 1586-1647 문신, 자 자겸, 호 지천. 이항복, 신흠의 문인.
병조정랑 때 폐모론으로 파직,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 이조참판. 정묘호란 때
 강화 주장- 항복이 결정되자 항서를 초안했다-심양에 다녀와 영의정, 중국 다녀와
 완성부원군. 문장과 글씨 이름나
'샘물로 세속의 시끄러운 소리들은 귀 씻고/ 차로서 익힌 음식 먹은 창자 축이네/
남은 생애 이로서 만족하거늘/ 어찌 도를 굽혀서 상하게 하리오'
최범술 崔凡述- 1904 다솔사 앞마을 출생-1979 입적. 호 曉堂
1915 곤양보통학교 졸업-1916년 다솔사로 출가-승려신분으로 일본 유학(大正大學
불교학)-귀국 박열의 천황 암살계획 돕다 8개월 옥고-단재 신채호 유고 간행 또 고
 초겪어-만해 한용운의 제자로-해방후 해인사 주지 등 다양한 경력-1960(56세) 부터
1979년 입적 때까지 다솔사 조실 주석, 여생을 차로 회향한다.
연기조사,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 茶僧들이 머물렀던 사천 다솔사 (법당 뒤로 차밭)
다양한 이력: 승려이자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배포 등 독립운동가, 제헌국회의원
 으로 활동한 정치가, 국민대학교를 창설한 교육자, 茶道人 등이다.
그의 다도는 엄격 했고, 차맛은 짜기로(진한맛) 유명했다. 다솔사 작설차(般若露)맛
 에 자부심. 또한 차 대중화를 이끈 일등공신으로, 한국차인연합회 발기인으로, 창립
 회원으로 적극 도와 이나라 최초의 차단체 발족에 기여함.
그는 "공연히 바쁠 것이 없는데 자기가 만들어서 바쁜 거이지" 飮茶란 느림으로 돌
 아가서 자기를 성찰하는 행위이다. 차를 국물 마시는 것처럼 훌쩍 들이켜서는 안
 된다. 차의 五味를 다 느끼기 위해서는 혀를 충분히 적신 다음 아주 서서히 감사한
 마음으로 마셔야 한다. 고 했다. 해방후 처음 다서인 '한국의 다도'를 출간.
최석정 崔錫鼎- 1646-1715 자 汝和, 호 明谷. 영의정 鳴吉의 손자. 陽明學 연구
 남구만, 박세채의 문인. 이조판서. 우의정으로 奏請使로 청에 다녀옴. 영의정으로
 소론의 영수가 되어 파란겪음. 8차례 영의정 역임. 문장과 글씨에 능함. 차인 집안.
최치원 崔致遠- 857년(신라 문성왕 19)~미상. 경주 사량부 출생-본관은 경주. 호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육두품 출신으로 12세에 당나라로 유학 17세 때 빈공과에 급제,
 879년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고변의 종사관으로 '討黃巢檄文'을 지어 문명을
 날렸다. 당의 혼란과 부모의 병환으로 28세에 귀국(헌강왕)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등을 지냈으나 진골 중심의 독점적 신분체제에 절망하여  42세 때 자의반 타의반으
 로 가족과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다 지리산에도 들어가 청학동과 삼신동, 고운동계곡,
 천왕봉아래 법계사, 차밭이 드넓은 화개동에서 차를 마시며 신선처럼 산다.
 합천 해인사 紅流洞 계곡가에 표지석이 서 있다. '孤雲崔致遠先生遁世地' (외로운
 구름처럼 떠돌다 간 고운 최치원이 은둔한 땅)
 저술에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이 전한다.
최한기 崔漢綺- 1803-1879 호 惠崗. 실학 연구로 많은 저서 남김
 풍계명찰 楓溪明察- 1640-1708 속성 박씨, 법호 풍계, 금강산 풍담의심의 법을 이음
 해인사 백련암에서 입적. 시문을 잘하고 차를 즐김. '풍계집'이 전한다.
하진 河진- 1597-1658 문신, 자 晉伯, 호 台溪.
효성이 지극하여 사임과 출사를 반복 持平을 지냄.
한영정호 漢永鼎鎬- 1870-1948 성 박씨, 호 한영, 법명 정호.
한국 근대불교 교육에 평생을 바침. 유학을 공부하다 19세 출가. 금산, 환응, 경운
 에게 수학하고 설유처명의 법을 이음. '해동불교' 창간, 불교전문학교 교장 역임.
우리 불교를 일본 조동종에 예속시키려 하자 만해와 함께 반대운동을 폈다.
敎正에 추대됨, 백양사에서 입적. 저서 '석전시초' 등.
한용운 韓龍雲- 1879(고종 16)~1944. 본관은 淸州. 속명은 裕天.  자는 貞玉. 호는
  萬海. 戒名은 奉玩. 승려, 시인,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에 시집 '님의 침묵'을 출
 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섰고, 청년 운동을 강화하여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
 였다. 저서- 조선불교유신론 등
한유 韓愈- 中 唐. 唐宋八大家. 古文운동 주도. 저서 '창려선생집'
한창기 - <뿌리깊은 나무> 발행인
 우리문화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안목을 갖춘 교양인으로 차보급에 앞장섬.
함월해원 涵月海源- 1691-1770 속성 이씨, 법호 함월, 14세 출가, 환성지안에게 배워
 법을 이음. 특히 화엄과 염송에 통달, 저술 '천경집'
 <백양산> '한 줄기 차 연기는 대와 어울려 냉연하고/ 시내에 맑게 비친 반달은
 넝쿨 사이로 보이네'
함허선사 涵虛禪師- 1376-1433 충주 출생, 법명 己和, 호 得通, 당호 涵虛
성균관에 입학 공부하다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관악산 의상암으로 입산- 이후
 회암사로가 무학대사의 가르침을 받고, 여러 절을 거쳐 회암사로 돌아와 깨달음.
현등사와 강화도 淨水寺에 부도, 봉암사에 비가 있다.
저서를 많이 남김: 顯正論, 儒釋質疑論, 원가경소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함허화상어록 1권 등. <그의 차시> 한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으니/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에 담겼어라/ 마땅히 이 차 한 잔 한번 맛보시게/ 한번 맛
 보시면 한없는 즐거움이 솟아난다네. <차시> ...화로에 차 달이는 연기 향기로운데
/ 누각 위의 옥전玉篆의 연기 부드러워라/ 인간세상 시끄러운 일 꿈꾸지 않고/
다만 선열 즐기며 앉아서 세월 보내네.
황현 黃玹- 1855-1910 梅泉野錄 지어- 1846년 흥선 대원군이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면서 고려 때 절 가야사 5층 석탑을 무너뜨리자 백자 2개와, 단차2병, 사리
 구슬 3매가 나왔다는 차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허균 許筠- 1569(선조2)- 호 교산, 저서 홍길동전
 부친은 서경덕의 제자로 동지중추부사 許曄으로 명문가 출신이다. 일본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온 許筬이 이복형, 許봉과 蘭雪軒은 동복형제다.
9세에 시를 짓고, 학문은 유성룡에 배우고, 시는 이달에게 익혔다.
문과 重試에 장원, 후일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종사관으로 학식과 글재주 떨침.
그러나 불교를 믿는다는 감찰을 받아 몇번의 파직과 복관을 거듭하다 결국은 역적
 모의 죄명으로 동료와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한다.
그가 于筒水(남한강 발원지-진부 상원사 염불암)의 물로 차를 마시고 싶다 는 차시
'...봄 지난 수풀의 꽃은 병든 눈을 닦아주고/ 비 갠뒤 산새들은 그윽한 잠을 청하네/
차단지에 달인 차로 소갈증을 없에고 싶지만/ 어찌 제일로 치는 우통의 샘물을
 얻으랴'
허목 許穆- 1592-1682 호 眉수. 전서를 잘씀
허백련 許百鍊- 1891(고종 28)~1977. 본관은 陽川. 호는 毅齋, 전남 진도 출생.
 한국화가. 의재미술관.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석 입선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 교장.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지냈다.
 1946년 무등산에 5만여평의 차밭을 사들여 三愛茶園,을 설립하여 春雪茶를 생산
 하였다.
 고종 때 진도에서 태어나 해방후 격동기를 살다간 호남화단의 단군신봉자였다.
 소치 허련이 종고조뻘, 11세에 소치 아들 미산 허형에게 묵화의 기초를 익힘-일본
 메이지대 입학 법정학 3년 수료후 미술로 진로 바꿔 동경 6년간 일본 남종화의
 대가인 小室翠雲에게 인정받아 그의 화실에 기숙하며 영향을 받는다. 귀국후 1922
 서울에서 일본 유학때 알게된 동갑 인촌 김성수를 우연히 만나 그의집 2층에 기숙
 하며 그림을 그리다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산수화를 출품하여 1등 없는 2등에
 입상 각광받아. 노산 이은상과는 다우였다. 노산의 詩 <무등차의 고향>
 '무등산 작설차를 돌솥에 달여내어 초의선사 茶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또 한
 잔은 빛깔 보고 다시 한잔 향내 맡고 茶道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그는 남종화 뿐만 아니라 초의선사의 차맥도 잇는다. 여러 차맥 중 호남의 남종화
 맥을 따라 소치-미산-의재의 춘설차로 이어진 것. 육당 최남선도 <무등차>연시조중
 '차 먹고 아니 먹은 두 세계를 나눠보면 富盛한 나라로서 차 없는데 못 볼러라
 茗葉이 無關世道라 말하는 이 누구뇨'- 차야말로 세상의 道와 무관치 않다.
 평소 제자들에게 '고춧가루를 많이 먹으면 국민들의 성질이 급해져서 나라가 망하
 고 차를 많이 마시면 정신이 차분해져서 나라가 흥한다'고 당부 했다.
 화업을 잇고있는 손자 許達哉에게 '내 그림이 최고로 보일 때는 손이 앞서 간 것이
 고, 내 그림이 작게 보일 때는 눈이 앞서 간 것이다'라고 경책- 손과 눈을 떠나 마음
 으로 그리라는 말이다.
허련 許鍊- 1809(순조9년)-1892, 호 小癡, 진도 雲林山房은 그가 말년에 은거한 작업
 실이다. 이곳에서 아들 米山 許瀅, 손자 南農 許楗으로 대를이어 南宗畵의 진경을
 보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윤선도 고택에 초동으로 들어가 그림과 인연, 가까운
 대흥사 일지암 초의선사 茶童으로 차인수업, 1839(헌종5년) 31세에 추사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화배워, 1842년 權敦仁 집에서 헌종에게 그림보여 궁중화가가 되었고
 벼슬도 지중추부사(정2품 무관직), 다산의 아들 학연, 흥선대원군 이하응, 민영등
 과 교우, 추사가 제주도 유배시 초의가 만든 차를 가지고 세번이나 바다를 건너가
 스승을위로함, 남종화와 산수수묵화의 효시인 중국 왕유를 본떠 허유로 개명.
허준 許浚- 1539-1615(광해군7) 본관 양천(가양동), 자 청원, 호 구암
 조부와 부친 무과 출신, 그는 29세 의과에 급제-의관-어의가되어 왕의 신임과 명성
 을 얻어 堂上의 품계를 받고 사헌부, 사간원의 상소에 시달림-임진왜란 때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 扈從功臣이 된다. 1596(선조20) 선조의 명을 받아 의인들과
 함께 [동의보감]편집에 들어갔으나 정유재란을 만나 중단되고 혼자서 1610(광해군
2)에야 25권 25책을 완성한다.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 집대성한 한방의학서로서 내
 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 등 5편으로 편집됨. 곧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는 '물은 생로병사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찻물의 으뜸으로 천기가 충만한 새벽에
 처음 긷는 정화수, 그다음으로 寒泉水를 들었다.
東醫寶鑑-2009. 7. 31(금) 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됨(한국의 기록유산 7번째)
차에관한 내용- 차나무의 성질은 약간 차고 ,맛은 달고 쓰면서 독이 없는 식물이다.
그 성질이 쓰고 차면서 기운을 내리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한다. 또한 소갈증을 멈
 추게 하고, 잠을 적게 해주며, 화상 입은 곳에 독을 없애준다.
차의 공덕- 머리를 맑게 해준다. 귀를 밝게 해준다. 밥맛을 돋운다. 소화를 촉진시켜
 준다. 술을 깨게 해준다. 잠을 적게 자게 해준다. 갈증을 없애 준다. 피로를 풀어다.
추위와 더위를 덜 타게 해준다.
入手足厥陰經에 차는 반드시 뜨겁게 마시라. 차게 마시면 담痰이 모이고, 오래 마시
 면 사람에게서 지방을 빼서 여위게 한다.
차나무는 치자와 같고 겨울에 잎이 나는데 일찍 딴 것을 차라 하고, 늦게 딴 것을 명
茗이라 하며 그 이름은 5가지가 있다. 차茶, 가, 설, 명茗, 천 이다. 유적지-구암공원
 허차서 許次서- 중국 명나라 사람. 해적 없다. 저서 다소茶疏
허초희 許楚姬- 1563-1589 호 蘭雪軒. 동지중추부사 허엽의 딸, 許筠의 누이다
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풍으로 명작을 남김. 어려서부터 차에 익숙함.
明의 朱之蕃이 '蘭雪軒集'을 출간 격찬을 받았고, 일본서도 간행돼 애송되었다.
허황옥 許黃玉-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비妃. 시호는 보주태후普州太后.
 민간에서는 許皇后라 하며, 金海 金氏, 김해 許氏의 시조모가 된다. 삼국유사 가락
 국기에 본래 인도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였는데, 부왕이 꿈에서 상제의 명을
 받고 수로왕의 배필이 되게 하였다고 한다.
혜소 慧昭- 774(혜공왕 10)~850(문성왕 12). 속성은 崔. 자는 永乙. 호는 無衣者.
 신라 후기의 고승으로 민간에서는 眞鑑國師, 진감화상으로 알려졌다.
 당나라에서 범패를 배우고 돌아와 지리산에서 玉泉寺를 창건하고 수도하였다.
 최치원이 그의 碑銘을 지었다. 저서-어산구감魚山九鑑.
혜장선사 惠藏禪師- 1772(영조48)-1811(순조11). 성 金. 호 蓮波, 兒菴. 두륜산 대흥사
 에서 출가, 1805년 유배온 정약용과 교유 법호 아암을 받고 역경을 배움. 이 만남은
 후일 초의와 추사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어 조선 후기 차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됨
 귀양온 다산을 만나 儒佛에 걸쳐 공부하다 불교의 허망함을 지적받고 차를 배우고..
 40세에 요절. 저서 '아암집' 강진 백련사,
홍량호 洪良浩- 1724-1802 자 漢師, 호 耳溪.
교리, 경흥부사, 대사간 때 동지부사로 청에 다녀옴. 평안도 관찰사.
1794년 동지사 겸 사은사로 청에 다녀옴. 글씨, 고증학에 깊었다.
홍위 洪위- 1620-1660 호 淸溪. 경상 관찰사.
홍원주 洪原周- 호 幽閑堂 洪氏. 洪顯周의 누이, 沈宜奭의 부인
 어머니 영향받아 시재를 발휘 '幽閑集'에 190여 편의 시를 전함.
홍현주 洪顯周- 1793-1865 본관 豊山, 자 世叔, 호 約軒, 海居齋, 해거도인
 정조의 둘째딸 숙선옹주와 혼인 영명위에 봉해짐, 1815(순조15) 지돈녕부사가 됨.
그의 집안은 모두 차인들이었다. 7대조 洪桂元, 영의정을 지낸 조부 樂性, 부친 仁謨
는 여류시인 令壽閤 徐氏와 혼인 슬하에 우의정 지낸 奭周, 吉周, 原周, 顯周를 둔
 명문 차인집안으로 수백편의 차시를 남겼다.
문장이 뛰어나 당대의 세도가들과 교우가 넓었고, 특히 초의선사와는 차로써 우정
 을 나누었다.- 東茶頌을 지은 동기도 그가 茶 만드는 법을 물은 데서 연유한다.
다산 정약용이 57세에 해배되어 양수리 부근 고향집으로 돌아오자 자연스럽게 친교
 있는 차인들이 모여든다. 草衣禪師, 추사 金正喜, 아우 金命喜, 丁若鏞의 아들 學淵,
學游 형제와 東樊 李晩用, 威堂 申櫶, 苕泉 金履陽, 檀園 金弘道, 楓石 徐有구 등과
 돈독했고, 청의 석학들과도 시문과 선물을 주고 받으며, 일반인과는 달리 경제적으
 로 여유가 있었다.
황호 黃戶- 문신, 자 子由. 호 漫浪. '만랑집', '東사錄' 성리학자, 관은 諫議大夫,
일본과 중국에 사행으로 다녀와 그나라에서 보고 느낀 茶에 관한 詩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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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전의 차인들>
함허기화, 벽송지엄, 허응보우, 청허휴정, 정관일선, 운곡충휘, 뷰휴선수
 사명유정, 청매인오, 소요태능, 중관해안, 편양언기 등 20 여명
 권근 변계량, 하연, 유방선, 정극인, 김수온, 안평대군,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이승소, 강희맹, 성간, 김종직, 김시습, 홍귀달, 성현, 유호인, 김흔
 채수, 남효온, 조위, 최부, 이식, 이원, 김일손, 이현보, 이주, 정희량, 김세필
 홍언충, 김극성, 박상, 심의, 홍언필, 권발, 김안국, 이행 등 100명 이상
<임란 후의 차인들>
취미수초, 허백명조, 백곡처능, 백암성총, 월저도안, 풍계명찰, 설암추봉
 무경자수, 함월해원, 오암의민, 묵암최눌, 연담유일, 경암응윤, 아암혜장 등 40 여명
 윤근수, 이산해, 김성일, 유운룡, 이성중, 최립, 김우옹, 이덕흥, 이정암, 유성룡
 이순인, 정구, 양대박, 조헌, 이순신, 조호익, 성여신, 심희수, 유근, 이정형
 임제, 허봉, 민인백, 이호문, 장현광, 한응인, 이달, 차천로, 이항복, 김용
 유몽인, 오윤겸, 이준, 김상용, 이덕형, 이수광, 허초희, 이정구, 유숙, 노인
 신흠, 강항, 조위한, 이경전, 양경우, 허봉, 권필, 이민성, 김상헌, 이안눌, 김류
 조찬한, 홍서봉, 김봉조, 성여학, 목대흠, 조희일, 임숙영, 신민일, 김육, 정흥명
 이식 등 300 여명
 
- 계속
- 참고문헌: 茶道古典(尹炳相), 韓國茶文化史(류건집), 茶人기행(정찬주) 外
- 기록정리: 木 里